posted by 미까 2008. 5. 26. 18:41

제갈량 (諸葛亮)

흔히 삼국지 하면 유비, 관우, 장비를 떠올리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엄청난 포스로 삼국지의 한 부분을 장식한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한승상무향후제갈량 되겠다.



<제갈량의 초상. 학창의와 윤건, 그리고 학익선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먼저 제갈량의 일대기를 짤막하게나마 살펴보자.

제갈량은 한나라 영제 광화 4(181)에 서주 낭사군 양도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제갈규는 비록 잘나가는 귀족가문 출신은 아니었지만,

서한 원제 때의 명신 제갈풍의 후예로서 나름 자부심이 있는 가문이었다.

제갈규는 슬하에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고 하며,

3명의 아들은 장남 근, 차남 량, 그리고 삼남 균이다.

모친 장씨는 제갈량이 3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부친 제갈규도 8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

이후 살림은 숙부인 제갈현과 함께 하게 되었다.

당시 제후들의 알력다툼이 심했던 동란의 시기인지라,

제갈량의 고향인 낭사는 전쟁의 피해가 극도로 심한 지역이었다.

그때 마침 양주자사 원술의 요청으로 태수 관직을 얻을 뻔한제갈현은

마침 한 조정에서 다른 태수를 임명하는 바람에

관직을 버리고 제갈량과 형제들을 데리고 옛 친구 유표에게도 간다.

유표가 다스리는 양양 땅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제갈량은

당시 학문 수양이 가장 빈번했다는 양양 땅의 여러 유명인사들과 만나며

이후 12년간 학문을 다지게 된다.

특히 제갈량의 스승이었던 수경선생 사마휘는 일찍이

제갈량의 능력을 간파하여 그를 와룡이라고 칭하였으며,

제갈량과 동문수학한 서서, 방통 등과 함께 학문적인 인맥을 넓히는데 힘썼다.

건안 2, 제갈량이 17세때 숙부 제갈현이 세상을 떠나자,

제갈량은 아우 제갈균과 함께 양양의 근처인 융중으로 터전을 옮긴다.

이후 10년간 융중에서 기거한 제갈량은 그가 27세 되던 해

유비의 삼고의 방문을 통해 마침내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게 된다.

이 때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시한 것은 바로 "천하삼분지대계".

정세가 혼란한 시대를 3개의 국가가 균형을 이루어 지배한다는 논리로,

당시 여러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감되었던 시대적 통찰력의 실천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비를 따라 융중을 떠나 세상에 나온 제갈량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유비군의 정식 군사가 된다.

이에 불만을 품은 관우, 장비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 앞에서

제갈량은 때마침 쳐들어온 하후돈의 군대를 맞아 박망파에서 화공으로 적을 물리치며

그의 능력을 실감하게 만든다.

이후 조조의 추격을 피해 도망을 치게 되는 유비에게

제갈량은 유표가 다스렸던형주를 취하여 기반을 다지자고 제안한다.

형주는 그가 제안한 천하삼분지대계의 가장 핵심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표와의 우애와 명예를 위해 형주를 거부한 유비때문에,

결국 양양 동쪽 근방에 임시로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이후 조조의 견제를 피할 방법은 당시 강동의 강호라 불리운 손권과의 화친이라 생각한 제갈량은

때마침 조조의 침공에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분쟁중이던 오의 고민을 안고 온 사신 노숙과 함께

동오로 건너가 손권에게 화친을 권유하게 된다.

주전파의 대표자였던 주유와 뜻을 같이 하게 된 제갈량은,

조조의 대군을 무찌르기 위해 적벽에서 화공을 써야 한다는 계책을 세우게 되고,

중국역사상 가장 스펙타클한 전투로 기록된 적벽대전을 치르게 된다.

조조의 100만 대군은 적벽대전에서 대패하게 되고,

유비는 이를 기세로 형주까지 차지하게 된다.

이는 철저히 제갈량의 계책에 의하여 성사된 것인데,

겉으로는 오와의 협력으로 조조를 물리치면서,

속으로는 형주 노른자 땅을 빼앗는 실리주의를 택하였다.

이에 주유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제갈량에게 대적하지만,

제갈량의 계책에 번번히 실패하게 되고 결국 주유는 화를 참지 못하여 세상을 뜨고 만다.

<제갈량이 묻혀있다는 정군산에 있는 제갈량상>

조조의 패배와 손권과의 화촉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된 유비군은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드넓은 서촉 땅을 정벌하게 된다.

제갈량과 쌍벽을 이룬 전략가 방통과 함께 서촉정벌을 떠난 유비군은

중간에 기습으로 방통을 잃게 되지만,

결국 유장의 항복과 함께 서촉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때가 건안 19, 제갈량이 세상에 나온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이로서 대륙은 위--오의 삼국시대로 본격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균형을 이루던 삼국의 형세는,

건안 24년 위와 오의 협공으로 형주를 탈취하게 되면서 달라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형주를 방어하고 있던 관우가 운명을 달리하였고,

이듬 해인 건안 25년에 조조 역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조조의 뒤를 이은 조비는 헌제를 폐위하고 위 문제를 칭하여

마침내 후한의 장대한 역사를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이에 격분한 유비는 제갈량의 추대로 촉한의 황제에 오르게 되고,

후한의 정통성을 계승한 진정한 왕조임을 천명한다.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장비마저 암살당하고

이듬해인 장무 2(222)에 오 정벌을 감행하지만

육손에 의해 백제성에서 대패하여 유비는 생을 마감한다.

유비의 유언에 따라 촉한을 다스려줄 것을 부탁받은 제갈량은

신하된 도리로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며

유선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영토를 안정시킬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첫 번째 계획은 드넓은 토지와 풍족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남만을 정복하는 것.

10개월에 걸친 원정 끝에 남만의 왕 맹획을 굴복하게 하여 남만을 평정시켰다.

이후 조비가 죽고 그의 아들 조예가 제위를 잇자,

기회라고 판단한 제갈량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을 감행하게 된다.

파죽지세로 몰아부치던 촉군 앞에 바람앞의 등불이 된 위나라.

하지만 유배 중이던 사마의가 기습 등용되면서 가정을 급습.

제갈량이 총애하던 마속은 가정전투에서 어처구니없는 전략으로 대패하고,

결국 철수하게 된 제갈량은 그 죄값으로 마속을 참수하고 자신도 군사로 강등시킨다.

다시 북벌 계획을 세운 제갈량은 후출사표를 올리고 다시 북벌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조운이 노환으로 사망하고 5호 대장군을 모두 잃은 제갈량은

그들의 아들들을 이끌고 북벌에 올라 파죽지세로 위나라를 공격한다.

하지만 4년 넘게 이어진 2차 북벌의 끝에는

어이없게도 황제 유선으로부터의 철수라는 명령이 있었다.

식량 부족과 촉한 내부에서의 갈등으로 결국 철수를 하게 된 제갈량은

건흥 12(234) 오장원에서 진을 치고 사마의와 최후의 대결을 펼친다.

이 전투에서 제갈량은 사마의를 사지에 몰아 죽일 번 하였으나,

하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사마의를 보고 길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234 8월 과로와 지병으로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었던 제갈량은

5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그의 후계자인 강유에게

촉한의 뒷일을 맡게 한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방영하여 큰 인기를 끈 중국판 삼국지 드라마 속의 제갈량>

제갈량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보면 그야말로 초영웅적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초야에 묻혀 지내다가 유비에 의해 세상에 나오고

이후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촉한을 위해 충성을 다했으며,

세기의 라이벌 사마의를 만나 치열한 대결을 펼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지를 발휘하며 눈을 감는 인물.

그러면서도 일평생 타인에게 부끄러운 점이 없었고,

매사 청렴결백하였으나 검소하기 이를 데 없는 성인군자.

훗날 유대교의 성인으로 추존받을 정도로 거룩한 인물 되시겠다.

여러 삼국지연의를 보면 사실 제갈량은 가장 완벽한 인물로 묘사됨을 숨길 수 없다.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견주어 뒤질 것이 없는 인물로 보았을 만큼

그가 행하였던 정치, 외교, 전략, 전투, 리더십 등은

21세기인 지금에도 본보기가 될 정도로 초절정으로 훌륭한 것들이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멀티히어로 제갈량.

하지만 우리는 그를 진정 무엇으로 평가해야 좋을까?

제갈량이 보여주었던 여러가지 놀라운 비책들.

예를 들면, 팔진도라던지 목우와 유마, 솥발형상의 삼국정세, 동남풍 등등

오직 제갈량만이 가능했을 법한 역사적인 사실들.

그 모든 것들이 진정 제갈량의 놀라운 마법 때문일까?

제갈량이 창안하였다는 팔진도에 대해서는 사실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당나라때 제갈량의 팔진도에 대한 평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어떠한 형세로 진을 짰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심지어 제갈량이 직접 저술하였다는 심서에도 그 기록은 없다.

다만, 팔괘진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으며,

다양한 진법 변화가 가능하여 무려 3 6천여 가지에 이른

변진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어릴 적부터 손자병법과 육도, 삼략 등의 병서를 통달한 제갈량이라면

팔진도처럼 매우 강력한 진법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아직도 원형을 파악할 수 없다는 목우와 유마도 논란의 대상이다.

목우와 유마는 단지 글을 토대로 나무로 만든 소와 말 형태의 이동수단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대량의 식량이나 물건을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현재의 리어카와 비슷한 형태로 추정된다.

사실 이 물건은 제갈량의 업적이라기 보다는

그의 아내 황씨 부인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명사 황승언의 딸이기도 한 황씨 부인은

이미 그 총명하기가 제갈량에 견주울 정도라고 하며

중국 역사상 가장 총명했던 여인 4인방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당대 최악의 추녀라고도 알려져 있다지만, 어쨌든 하늘은 공평한 법.

못생긴 만큼 천재적인 두뇌를 주어서, 황씨 부인은 여러모로 제갈량을 도왔다고 한다.

응용력이 탁월했다는 황씨 부인은 제갈량에게 목우와 유마 외에도

연노(다연발 활)나 기타 전투에서 쓸만한 도구들을 창조해냈다고 한다.

<게임에서 그려진 젊은 모습의 제갈량. 어째 느끼하다??>

제갈량을 3번 찾은 유비에게 제갈량이 던졌다는 회심의 말.

바로 솥발모양의 삼국의 정세. 이른바 천하삼분지대계.

이는 과연 제갈량의 독창적인 세계관이었을까?

여러 학자들의 고찰에 의하면 당시 천하삼분지대계는

제갈량을 비롯해 황승언, 사마휘 등 여러 지식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언급되었던 대세론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어느 누구 편에도 들지 않고

자유롭게 음주와 명상을 통해 대화를 나눴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그들에게는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는 바,

그것이 바로 천하는 3개로 나뉘어질 수 밖에 없는 형편이라는 것이었다.

천하삼분지대계를 직접적으로 설파한 사람은 제갈량이겠지만,

실제적으로 주유나 노숙, 순욱, 순유 등의 지략가들도

모두 어느 정도 공감대는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이번에는 가장 핫 이슈인 동남풍에 대해 알아보자.

적벽대전의 승패를 갈랐던 비장의 무기 동남풍.

겨울이면 북서풍이 부는 적벽에 때아닌 동남풍을 일게 하여

연합군의 화계가 100% 성공할 수 있게 만든 제갈량.

제갈량의 귀신과도 같은 술책에 놀라

주유가 죽여야 후환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공포에 떨게 했다는

그 문제의 동남풍 쑈.

과연 제갈량이 매직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일까?

최근들어 사실주의를 택하는 삼국지 저서가 늘어나면서

이에 대해서는 나름 실마리가 많이 풀린 상태이다.

천문학에 능통했다는 제갈량이 당시 적벽의 날씨를 예측하면서

언제쯤이면 안개가 끼고 언제쯤이면 바람이 바뀌겠다는 것을

충분히 사전에 감지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10만개의 화살을 얻게 되는 계책에서도

제갈량은 미리 안개가 낄 것을 감지한 만큼,

북서풍이 불다가 일순간 동남풍이 불 것을 충분히 감지했을 터.

따라서 제갈량은 주유가 자신을 죽일 것을 알고

미리 탈출구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제단을 지어 쑈를 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이 사실은 제갈량이 단순한 병법 외에도

천문학 등의 부수적인 지식에도 능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제갈량은 매사에 복합적으로 생각하고 전략을 꾸몄다는 말이 되는데,

그야말로 소름끼칠 정도로 철두철미하지 않은가?

필자로서는 사실 제갈량의 능력 중 가장 으뜸으로 치고 싶은 능력을

심리전이라고 칭하고 싶다.

그 어떠한 설전에서도 지지 않았던 제갈량.

그리고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모두에게 설득시킬 수 있었던 말재주꾼.

이는 특유의 심리전에 강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오와의 공동전선을 형성할 때의 일일 것이다.

당시 위의 협박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손책에 대해

항전의 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제갈량이 내뱉었던 말들.

흔히 도움이 필요한 쪽에서 몸을 숙이고 들어와야 할 제갈량이 당연한데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손책에게 위의 협박에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외교사절로 왔다면서 되려 항복을 하라고 권유하는 심보는 무엇인가?

이미 이러한 설정에서부터 손책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것.

제갈량은 유비와 손책을 비교하며 유비는 영웅이고

손책은 일개 군주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폄하한다.

, 손책의 자존심을 뭉개뜨려서 억지로라도 싸우게 만들겠다는 계획이었고,

손책은 보기좋게 속아넘어 항전을 외친다.

그 뒤에 벌어지는 주유와의 대결은 삼국지 역사상 최고의 심리전.

이미 심리전에서 나름 내공이 쌓였던 주유도 제갈량의 심리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

그래서 주유는 제갈량을 한 방 먹이기 위해 자기는 항복하고 싶다고 얘기하지만

제갈량은 의외로 이에 호응하며 전쟁을 아주 간단하게 끝내는 비책을 얘기해준다.

그것은 다름아닌 강동의 두 미녀 대교와 소교를 조조에게 바치면 된다는 것.

하지만 대교와 소교는 손책과 주유의 아내였던 것.

주유가 그것이 무슨 소리냐구 욱하게 만듦으로써 제갈량이 이미 판정승.

이는 조조가 동작대교를 지으면서 읊은 시의 문구를 따서

동음이의를 이용하여 교묘하게 주유를 속인 케이스이다.

동작대의 두 다리()를 강동의 두 교(대교와 소교)로 바꾸어 말했던 것.

주유가 평소 욱하는 성질이 있었음을 간파한 제갈량이었기에

주유는 보기좋게 계략에 넘어갔고, 그날 이후로 항전을 불사르게 된다.

이후에도 주유가 제갈량의 계략을 역이용하기 위해

10만개의 화살을 얻어오라는 무모한 명령도 내리지만

제갈량은 이를 미소로 화답하고 놀라운 계교로 완수함에 따라

주유는 더더욱 이를 갈고 제갈량을 죽여버릴 것을 다짐하게 된다.

이는 어쩌면 처음부터 주유의 성질을 건드려 스스로 극한까지 몰고 가게 하려는

제갈량의 깊고 깊은 계략이라고 볼 수 있겠다.

주유라는 걸출한 인재가 오나라에 있는 한 공동전선은 쉽지 않았을 법,

그래서 그 싹을 자르기 위해 주유를 제거해야 했지만

전쟁이 아니고서는 주유를 죽이기는 힘들었을 터이다.

그래서 주유의 급한 성격을 이용해 스스로 자멸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이후에도 주유는 계속 제갈량을 죽이기 위해 계략을 펴지만

오히려 늘 제갈량에게 역이용당하여 자신이 상처를 당하게 된다.

적벽대전의 승리 후에는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주유가 기를 쓰고 형주로 진격하지만

이미 제갈량의 선제 공격으로 형주를 함락한 상태.

이는 마치 조그마한 꼬맹이가 아무 상관없는 두 덩치에게 싸움을 붙이고

자기는 그 옆에서 싸움구경하다가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동전을

낼름 습득하는 그런 시츄에이션 되겠다.

조조를 화용도로 몰아넣었던 기지도 사실은

조조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심리를 이용하여 성공한 케이스.

그 외에도 희대의 라이벌이었던 사마의와의 대결에서도

그를 사지에 몰아넣어 죽일 번 했던 사건이라던지,

병사 후 철수를 하면서 추격하는 사마의를 돌려세웠던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겼다라는 주옥 같은 고사가 내려져올 정도의

뛰어난 계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은

하나같이 상대의 심리를 간파하고 그에 맞서 승리 비책을 꾸몄던

제갈량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제갈량의 전형적인 모습>

하지만 이토록 완벽해 보이는 제갈량에게도 단점은 있다.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임기응변에 다소 약했다는 것이

제갈량의 가장 큰 부족함으로 여겨질 수 있겠다.

특히 전술적 임기응변에서 약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치나 외교 면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능력을 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을 보면

이러한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갈량이 후출사표를 내고 2차 북벌을 감행하였을 때

진창성에서 제갈량의 전격전에 맞서 싸우다가

무려 20일이라는 공방전 끝에 제갈량으로 하여금

진로를 바꾸게 했던 다크호스 학소.

제갈량은 학소라는 위나라의 무명 장수를 만나서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빠지게 되는데,

당시 제갈량이 전략병기로 준비한

충차, 운제, 정란 등의 여러 무기들을 이용해

총 공격을 퍼붓지만 학소는 침착하게 대응하여

20일동안 농성을 펼치게 되고,

시간을 번 위나라는 왕쌍의 구원군에 의해 전세를 역전

결국 제갈량이 후퇴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평소의 제갈량이라면, 그리고 진창성과의 전투에

어느 정도 대비를 했었던 상황이라면

사전에 충분히 승리비책을 마련하여 문제없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의 전개와 더불어

빠르게 위의 중심부를 타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탓에

제갈량 스스로 조급함을 드러내어

오히려 자멸한 꼴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부분에서 제갈량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임기응변에는 여러 모로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또 다른 사례는 역시 북벌에서 나오는데,

사마의의 기습 작전에 가정을 지키지 못했던 사건이다.

마속은 제갈량에게 매우 총애를 받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 바,

평소 마속의 지식과 사람됨을 제갈량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갈량은 위연의 배반까지도 점 칠 정도로 평소

사람보는 눈에 일가견이 있지 않은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정이 급습을 당하자

마속으로 하여금 가정을 지키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속은 제갈량의 예상과 달리 보기좋게 어이없는 계책으로

스스로를 사지에 몰라 결국 가정을 빼앗기게 만들었지 않은가.

가정을 잃은 마속을 참수하고 자신을 군사로 강등시킴으로써

그 죄를 대신하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마속의 머리를 베어야 했던 제갈량은

분명 마속의 부족함보다 자신의 부족함에 더욱 원통해했을 것이다.

어쩄든 가정전투에서 사마의의 급습이라는 비보를 듣고

차분히 생각할 틈도 없이 급하게 계책을 꾸미는 과정에서

제갈량의 임기응변에 한계가 충분히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 외에도 관우가 형주성 전투에서 패하고 이후 참수당하는 사건에서도

필자는 제갈량의 한계가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사람들은 제갈량과 관우의 2인자 싸움이 배경이라고 하는데,

어차피 늙어버린 관우를 두고 노른자 땅인 형주를 잃어가면서까지

관우를 제거해야만 했을까?

그 보다는 육손이라는 오나라의 차세대 브레인에 의해

관우가 포위를 당하게 되자

이 사실을 접한 제갈량은 어쩌면 뜻밖의 일로 인해

기가 막힌 해결책을 쉽게 찾지 못하고 어영부영 응대한 것이 아닐까

하는 나름의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주유가 갑작스레 제안한 10만 화살의 사건은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분명 이는 제갈량의 목숨이 달린 뜻밖의 전개였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분명 주유의 인물됨을 알고 있었기에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시험해 볼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고려했을 것이다.

<제갈량과 주유의 만남.

둘은 서로 영웅임을 알아보았으나, 그 레벨에는 차이가 있었다>

제갈량이 심리전에서 능하고 인물평가에 일가견이 있었던 만큼

사전에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간파했다면

무엇이든 나름의 대응책을 충분히 준비했을 제갈량이다.

하지만 학소나 육손의 경우는 조금 예외라고 보여진다.

워낙 혜성같이 등장하다보니 그들을 깔보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강점과 약점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 한 명의 평범한 인간

제갈량을 재조명 해본다면,

그는 스스로 중국역사상 최고의 지략가로 군림하였다기 보다는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해 더욱 크게 빛난 타입이라고 평하고 싶다.

워낙 똑똑한 브레인을 겸비한 제갈량과,

엄청난 경험과 지식, 그리고 내공을 겸비한 학자이자 장인 황승언,

그리고 제갈량 못지 않게 명석하고 응용력이 뛰어났던 내조의 여왕 황씨부인.

이와 더불어 제갈량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했던 당대의 여러 지식인들.

이들이 있었기에 제갈량은 당대 최고의 지략가로 성장했고 인정받았다고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제갈량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있는 부분은

희대의 지략가도 아니고 희대의 정치가도 아니다.

한평생 변함없었던 그 청렴결백함과 도덕적인 인간상.

그로 말미암아 제갈량은 성인군자로 추대받았고,

여러 보살님들에 의해 신으로까지 모셔지기도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를 꼽으라면,

한 줌 망설임도 없이 제갈량을 꼽는다.

필자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참된 인간상과 더불어

시대를 관철하고, 늘 남보다 몇 수나 앞섰던 뛰어난 지략을 본받고자 합이다.

마지막으로, 제갈량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고 끝낼까 한다.

많은 영화나 드라마, 심지어 게임에서 늘 제갈량의 모습은

인자한 선비의 모습에 새우 수염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제갈량스러운 외모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후한 정서에 따르면 제갈량의 외모는 예상과 다르다고 한다.

키는 8척으로 현재의 185cm에 이르는 큰 키.

얼굴은 각이 지고, 수염은 턱 전체를 덮었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하여 어릴 적부터 무예에 능했다고 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샌님 스타일하고는 많이 다른 듯 하다.

진짜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공명이 어머니를 여의고 몇년후 아버지 제갈규마저 잃고

장형 제갈근의 보살핌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였을 때이다.

원래 공명의 집안이 없이 사는 집안이 아니었는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그들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친 것이다.

공명이 살던 시대는 오직 공부에만 전념해야지

성공할 수 있었을 만큼 공부분량이 많았는데

형 제갈근이 공명의 학업을 도운다고는 하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사를 떠맡게 된 제갈근이

공명에게 그리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제갈근은 그래서 공명을 당시 태산 산속에

30여 년간을 은거하며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던

거암선생이란 60세의 노인에게 유학을 보내게 된다.

공명이 거암선생에게 입문할 당시 거암선생의 제자 중에선

독보적인 존재였던 사마의가 있었는데

공명의 명석함을 안 거암선생은 사마의와 좋은 경쟁자가 되겠다 싶어

여럿의 제자들 중 그 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거암선생이란 사람은 보통 훈장이 아니었는데

그에게는 천하의 기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서에는 천문지리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병법의

용병 포진술을 비롯하여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되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면서 따르도록 하는 비법 등 온갖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정치 지도자의 실무지침서요, 장래의 일을 선견할 수 있는

예언서와도 같은 기서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을 가지게 되는 사람은 경천동지의 대사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임에 분명했다.

나이 늙어서야 이 기서를 입수한 거암선생은 이 책을 전수할 제자를 찾고 있었다.

거암 선생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것이다. 설령 자식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 기서를 함부로 전수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 했었다.

군울이 각지에서 할거하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 때요,

또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나 피비린내 나는 토벌전으로 날이 새고 밤을 맞는 때이다.

이런 때에 자칫 이런 기서가 소인배에게 들어간다면

국기가 흔들리고 말 위험이 있고 자기자신의 생명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기서를 전수할 사람을 찾기에 심사숙고하던 거암 선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거암선생은 그 기서를 물려받을 사람은 공

명과 사마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두 학동에 대해서

그 성품과 인덕, 그리고 지향하는 바를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눈치 빠른 두 학동은 이미 거암선생이

천하의 기서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서를 어떻게 해서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날 거암선생은 사마의와 공명을 데리고

병법 포진법의 강론을 위해 산에 오르는데

강론 도중 한 나무꾼이 발을 헛딛어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거암선생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강론을 계속하고

사마의도 꼿꼿이 앉아서 강론을 경청했지만

제갈량은 날듯이 산을 내려가 나무꾼을 구해 집으로 데려간다.

거암선생은 인품면에서 공명이 사마의 보다도 나음을 알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공명은 계모 원씨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거암선생의 허락을 받고 하산하여 원씨를 간병한 후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마의의 아버지가 중태라는 소식이 전해졌건만

사마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했다.

만약 자기가 없는 틈을 타 기서를 공명에게 물려줄까 봐

조바심이 나서 그랬던 것이지만 거암선생은 그 일로 하여

결정적으로 공명에게 기서를 물려줄 것을 다짐한다.

그로부터 1년 후 거암선생은 고령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자리에 눕고 만다. 학동들은 고명한 의원을

찾아다니며 탕약을 지어왔지만 사마의는 약을 다리어

스승에게 바치기는 하지만 의원을 직접 찾아다니지는 않는다.

거암선생이 병석에 누운지 두달이 되자

학동들은 하나 둘씩 떠나가고 오직 공명과 사마의만이 남게 된다.

어느 날 공명이 약초를 캐러간 사이 거암선생은 갑자기

병세가 약화되 공명을 찾지만 공명은 없고 사마의만이

있는 것을 알자 허공만 바라볼 뿐 사마의에게 기서를 물려 주지 않는다.

자신에게 기서를 물려줄 뜻이 없음을 안 사마의는

거암선생이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 집안을 뒤져

비단으로 곱게 싸여져 있는 상자를 발견하고 기서인 것으로 착각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승을 버리고 달아나버린다.

제갈량이 약초를 구해가지고 서당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후의 일인데 거암선생은 실낱간은 생명을 유지하며

기다려서 베개속에 감춰두었던 기서를 공명에게 부탁하며

자신과 집을 불사르라는 유언을 남기고 하직한다.

공명은 스승의 유언대로 서당과 스승의 시체까지 모두 태워버리고 집으로 하산한다.

한편 예의 기서를 가지고 집에 돌아온 사마의는

쾌재를 부르며 기서를 펴보았지만 책 머리에는

'나라를 얻는 자는 먼저 백성을 사랑하고 효도를 하는 자는 먼저 부모를 받드나니

이 두 가지를 못한 자에게 내 어찌 기서를 전할소냐.'

라는 글귀만 써있을 뿐이다.

사마의는 이에 크게 뉘우치고 오직 학업과 자신의 수양에만 전념하며

자신의 야망을 향해 차곡차곡 발을 내딛는다.

<전형적인 제갈량의 모습을 가장 잘 실사화시킨 영화 '적벽대전'과 제갈량 역의 금성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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